Garden Eel Lives The Black City

Jul 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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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이익이 아닌 사람들과의 연결에 대한 갈망은 여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오늘날이 사람들은 과거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더불어 존중과 애정과 활기를 필요로 한다.

 공동체의 표시는 구성원들이 서로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이슬람에서는 ‘살람 알라이쿰’이라고 인사하고, 히브리어의 인사말은 ‘샬롬’이다. 영어 peace은 평등 해서 어느 누구도 상대를 지배하거나 공격하려고 시도하지 않을 때 평화가 깃든다는 뜻이다. 흰두교의 인사말 나마스테는 ‘당신 앞에 절합니다.’라는 말로, 내가 당신보다 나을 것이 없고, 우리는 모두 삶의 정신과 신성한 불꽃을 품은 평등한 인간이라는 뜻이다.

수많은 문명이 먼지만 남기고 사라졌다. 여러 종족과 언어를 지배하던 막강한 제국도 지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로에게 인사하고 절하면서, 그 친밀함의 연결을 놓치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과의 연결은 온전히 살아있기를 바라는 갈망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만이, 겉으로 들어난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음을 알아가게 되는 것이다.

 

[Song+Kyong’s story]

 Black City에 살아가는 Garden Eel (정원 장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가늘고 긴 뱀 모양의 Garden Eel (정원 장어)는 바다 속 부드러운 모랫바닥에 작은 구멍을 만들며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꼬리를 모래 구멍에 넣은 상태에서 머리와 몸을 밖으로 길게 뺐습니다. 울렁이는 바다 물에 맞춰 춤을 추며 지나가는 플랑크톤을 잡아먹고 살았습니다. 하나의 구멍을 파서 평생을 사는 Garden Eel (정원 장어)는 혼자가 아닌 큰 무리를 지어 살아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큰 정원을 이룬 것 같이 아름답고 자유로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포식자가 나타나거나 위험을 느끼면 구멍 속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리고, 먹이를 먹을 때조차 구멍을 절대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고요한 바다에 누구도 본적이 없는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도시가 세워졌습니다. 아름답고 반듯한 창문을 가진 빌딩들은 들어와 살라고 Garden Eel들을 매혹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구멍을 파는 대신 창문 하나하나를 차지하고 바다 속 도시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플랑크톤의 움직임에 따라 자유로이 춤추던 아름다운 춤은 도시 속에 감쳐지게 되었고, 피상적인 관계들로 이루어진 빌딩만이 우뚝하니 남았습니다. 그리고 온몸은 눈부신 도시의 색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Garden Eel들은 점점 온전히 살아있지 못하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뜻하지 못한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침묵의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금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갈망하는 춤을 추기 위한 전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침묵 속에 일어난 이 치열했던 전쟁 이후, 화려하고 눈부시었던 도시는 검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도시는 온통 꾸며진 것들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명확히 바라볼 수 있는 흑백 빛의 도시(Black City)로 변화된(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나 긴 시간 이 눈부시게 화려한 도시에 살아온 Garden Eel들은 화려하게 변해버린 본인의 색을 간직한 체, 이상(꿈 같이 느껴지는 이상)을 이룬 듯이 살아갑니다. 치열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검게 변한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그들은 다시금 큰 갈등없이 이상을 져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며 정원을 이루고 살았던 삶으로 돌아가기엔 생각보다 많은 헌신이 필요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Contents_

1. 침묵의 전쟁 / Black City

왜 많은 사람이 온전히 살아 있지 못하고 반쯤 죽은 상태라고 느낄까.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인간을 정서적으로 충분히 지지해주지 못한다. 여전히 존중 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그저 절반만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법이 우리에게 원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할 자유를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근사 하겠지만 아무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고 우리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따라서 존중 받고 이해 받고 싶은 욕구가 헌법상의 권리보다 중요할지 모른다. 모두가 동등하게 한 표씩 나눠가지고 모든 차별이 철폐된다면 물론 만족스럽겠지만 탐욕과 악의와 시기와 자만이 평등의 기쁨을 앗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평등은 점차 막연한 신기루처럼 보일 테고 정작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견딜 만하게 해주는 것은 애정일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나이를 먹을 때 박애정신에서 도움을 받을 거라고 믿는다면 위안이 되긴 하지만, 그런 도움이 사무적이고 인색하고 마지못해 주어지고 또 그런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다 보면 점차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진다. 남에게 소중한 무언가를 주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남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남에게 힘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갈망하게 된다.

 온전히 살아있기를 바라는 갈망은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고, 아무 소리없이 매일매일 치열하게 일어나는 이 전쟁을 ‘침묵의 전쟁’이라 부른다.

 

2. Garden Eel (정원 장어)의 이상(꿈)

깊은 바다 속 Black City는 Garden Eel (정원 장어) 가 살아가는 터전이다.

 이 도시에서 오색찬란하게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침묵의 전쟁’ 후 도시 전체가 Black으로 변하게 되었지만, 그곳에 변함없이 그곳에 남았다. Garden Eel는 그저 꿈 같이 여겨지는 이상을 이룰 수는 없다고 해도 고상한 이상을 간직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한다. 그리곤 끊임없이 이상을 배반하면서도 이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다. 이상은 양심을 달래준다. 사실 그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자주 주장하지만 그만큼 이상에 헌신하지 않는다. 이들 같이 인간도 큰 갈등없이 이상을 저버릴 때가 많다.

 

3.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

자유를 쟁취하려는 시도가 수없이 좌절된 이유는 개인에게 자기만의 길을 가라고 부추기지만 개인들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는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불일치와 경쟁이 크게 증가하고, 소수 집단은 옆으로 밀려난 채 인정해 달라고 외치지만 자유 그 자체는 이들을 인정해주지 않는다.

충분히 존중 받고 온전히 이해 받는 사람은 거의 없고, 세상이 붙여준 꼬리표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에 관한 진실을 아는 길에는 장애물이 너무 많고, 사람들은 존경할 만하다는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위장을 많이 하고, 정부와 기업에서 말하는 거짓말과 절반의 진실이 난무하고, 홍보를 가장한 허구가 너무 많은 나머지,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은 무력감보다는 오해 받는 데서 더 큰 고통을 받는다.

친밀하고 사적인 관계만이 한 개인이 겉으로 드러난 캐리커처만은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는데도, 사적인 삶은 공적인 삶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폄하되고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이 충돌하지 않고 협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진지한 고민이 없었다.

 이 황량한 Black City에서 우리의 이상을 기억하면서, 우리와 당신 사이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공생과 위로의 감각을 찾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볼 시간이다.

선 드로잉으로 표현된 투명한 문어들은 도시 곳곳에 존재하며 도시로 밀려 들어온 Garden Eel(정원 장어)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온 삶의 시간을 바쳐 다음 세대를 지원해 왔고, 놓을 수 없는 사랑으로 존재한다. 또한 실질적으로 Garden Eel(정원 장어)들을 새로운 삶의 터전인 도시로 옮겨오게 한 조력자이다.

그들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다. 사랑은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해주고 타인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보기로 알려주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연민의 감정을 자신에 대한 걱정 너머로, 나아가 자녀로 인해 생기는 이기심 너머로 넓혀준다. 그리하여 마침내 개인이 혼자서는 마주하지 못할 삶의 불행을 야기하는 근원적인 공포, 곧 거부와 상실과 무능함의 공포를 비롯하여 행복한 모습의 이면에 감춰진 온갖 공포와 마주할 용기를 불러낸다.

그러나 컨트롤 타워 같은 기능을 포기하지 않은 조력자들과의 친밀한 관계란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 어디쯤 속해 있는지 알 수 없다.